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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 생활자의 수기

한 여름 밤의 꿈

typistzero 2013. 6. 30. 23:16

 

옥탑방에서 두 번째 여름을 보내는 중이다. 작년에는 초복, 중복, 말복까지 잘 견디고 중고 에어컨을 설치했다. 찌는 무더위 속에서 방바닥에 달라붙어 있다가 내린 결단이었다. 하지만 전기세 걱정에 웬만한 더위가 아니고서는 에어컨을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대신 더위를 피하는 다른 고전적인 방법들을 쓰는 편이다. 샤워를 자주하고, 문을 활짝 열어둔다. 집 벽에 물을 뿌리기도 하고, 가만 누워 체력 소비를 최소화한다. 여기까진 해가 지기 전까지의 작업들이다. 해가 지면 비로소 여름날, 옥탑방만이 할 수 있는 몇 가지 행복한 일이 일어난다.

주인아저씨가 가꾸는 작은 텃밭 옆에는 내가 이사할 때 사둔 작은 테이블이 있다. 그리고 등받이가 없는 플라스틱 의자 두 개와 애인이 주워온 의자 하나가 있다. 겨우내 텃밭이 쉬는 동안 그 공간도 쉰다. 텃밭이 푸릇푸릇해지면 그 공간도 움직인다.

봄이면 볕을 피해 내내 그곳에 앉아 있을 수 있지만, 여름은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뜨거운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는 그곳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어둑해지면 방에서 쓰는 스탠드를 밖으로 가져와 켜둔다. 애인이 놀러오면 거기 함께 앉아 각자의 일을 하다가 냉장고에서 맥주나 막걸리를 꺼내 마신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창문을 열어둔 동네의 집들에서는 사람 사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금이 가장 행복해.”

“나도.”

“우리가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 여유를 못 느끼겠지.”

“아마도…….”

 

직장에서 고된 하루를 끝내고 옥상에 앉아 애인과 마주보고 앉아 있는 여름밤. 모기향 냄새가 나는 여름밤. 옥상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애인과 나는 그 시간에 빠져든다. 그 기쁨은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보냈다는 안도감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균형감이 만든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일을 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감정들. 업무 때문에, 사람 때문에 생겨난 삶 곳곳의 스트레스와 간극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순간을 미처 몰랐을 테다.

 

“모기향 냄새가 좋아.”

“왜?”

“옛날 생각이 나. 어렸을 적에 모기향 피워두고 마당 평상에 앉아 수박을 먹던 때가 생각나.”

 

나는 애인에게 추억 속에 있는 하나의 풍경을 전했다. 그 풍경 속에는 마당과 평상, 모기행과 수박이 있었다. 그리고 그 집에 세 들어 살던 사람들과 내 또래의 자식들이 있다. 밤이 깊어지면 하나 둘 집으로 들어가고 나는 평상에 누워 촘촘하게 박혀 있는 별을 구경했다.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들.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고 여름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나는 오래 평상에 누워 있었다. 그때는 엄마의 무릎이 지금보다 젊었고 러닝셔츠를 아버지의 몸도 지금보다 단단했다. 아마, 아버지는 지금 내 나이와 비슷했을 거고 어머니는 나보다 어렸을 것이다.

모기향을 냄새가 좋은 이유가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존재했던 든든함과 안정감이 있었던 그 시기를 떠올릴 수 있기에. 나는 가만 평상에 누워 별을 보면서 아무렇지 않게 꿈꿀 수 있었기에. 책임질 게 방학숙제나 일기 따위만 있었던 그 날들을 잠깐이나마 서른 네 살의 지금으로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지금은 불안한 게 많다. 통장에 얼마만큼의 돈이 없으면 당장 내일이 불안하고, 내가 만든 책이 잘 나가지 않으면 이 일을 오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애인과 다투는 날이면 혼자될까 두렵고 퇴근길에는 저녁밥으로 무엇을 먹을까 생각한다. 마냥 이십 대인 것 같았는데, 서른 중반이 코앞으로 닥쳐 있고, 나는 무엇 하나 제대로 살아오지 못했다. 평범한 삶도 저 멀리 있는 느낌이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이 짧은 말이 지금 나에겐 힘이다. 불균형으로 가득한 세상에 유일하게 균형을 이룰 수 있는 몇 마디. 애인과 마주보고 맥주를 홀짝이며 내일도 잘 살아보자며 다짐하는 일 따위. 이게 없다면 나는 아마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나에겐 가장 안전한 우주이다. 어렸을 적, 여름날 평상에 누워 느꼈던 그 우주만큼이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애인과 나는 모기향을 피워두고 옥상에 앉아 있다. 테이블 위에는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 맥주 캔 두 개가 놓여 있고 육포 한 봉지가 있다. 애인은 <오피스>라는 미국 드라마를 보고 킬킬대며 웃고 있다. 내일은 월요일이다. 다짐한다. 일단은 열심히 살아보기로. 식상하지만, 나도 평상에 누운 아들을 바라보는 단단한 아버지가 되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