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마감한 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상 보는 일이 그만큼 느슨해졌다. 시를 쓸 땐 일상을 떠받치는 구조를 꼼꼼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 구조는 대부분 행복, 분노, 슬픔, 사랑, 이별, 욕망, 노동, 평등…… 이런 식으로 관념적이다. 관념을 해석하는 일에 나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그러나 회사 일에 치이다보면 바빠 지나칠 때가 많고, 가끔은 너무 평화로운 일상에 취해 대충 침묵할 때도 있다. 머리를 싸매는 일이 귀찮아서, 혹은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이렇게 방심하고 있는 거다. 덕분에 마감(회사 마감)을 끝낸 오늘은 좋은 시를 한 편 쓰고 싶다. 그런 날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를 쓸 것 같은 날. 김연아가 은메달을 땄다. 금메달을 딴 이보다 잘 했는데도. 한쪽에서는 이산가족이..
소일거리 삼아 리폼을 하거나 간단한 가구를 만드는 게 재밌다. 최근엔 이사를 하고 옥탑방에서 쓰던 좌식 테이블을 입식으로 리폼했다. 멍청해서 손이 많이 갔다. 덕지덕지 칠해둔 바니쉬를 사포로 몇날며칠 문지르다가 포기, 결국 페인트 리무버를 구입했다. (처음부터 그래야 했다. 리무버는 혁신이다.) 새로 산 소파 높이에 맞춰 다리 네 개를 사다가 연결하고 스테인을 발랐다. 생각보다 소파와 어울려 볼 때마다 나를 칭찬한다. N이 나에게 주문제작해 만든 테이블도 있다. 평소에 ‘자리관리’를 철저히 하는 N에게 딱 어울리는 테이블이었다. N은 그걸 혁명이라고 했다. 못이나 나사를 쓰지 않고 만들고 싶었지만, 기술도 장비도 없었다. 꺽쇠를 이용해 나무를 연결했더니 꽤 깔끔해보였다. 그러나 자찬일 뿐이다. 내 실력은..
2월 16일에서 17일 사이, 나는 이 글을 쓴다. 파주에서 몇 번의 주말을 지냈을까. 세어보지는 못했다. 거의 모든 주말을 N과 함께 지냈다. 소소하게 지냈다. 밥을 해먹고 도서관을 가거나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심학산에 가기로 약속은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고 있다. N은 낮잠을 잘 때도, 밤에 잠을 잘 때도 책을 읽는 버릇이 있다. 좋은 버릇 같아서 나도 따라 해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거금을 주고 소파를 샀고, 소파 높이에 맞춰 싸구려 좌식 테이블을 입식으로 리폼했다. 제법 카페 분위기가 난다. 고양이들이 다 긁어 놓아 해진 소파는 베란다에 놓았다가 다시 안에 두었다. 부러져 버린 다리 대신 벽돌을 주워다가 다리로 삼았다. 새로 산 소파를 꾸가 긁을까 걱정이라 늙 긁어대던 소파나 긁..
1653, 공병장비정비. 내게 주어진 주특기였다. 원래대로라면 4월 5일 훈련소를 나와야했지만, 휴일이었기에(아직 식목일이 공휴일이었던 2001년……)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하룻밤을 더 자서야 육군훈련소를 벗어날 수 있었다. 환장하도록 따스한 봄날이었다. 훈련병들은 퇴소 무렵에 주특기를 받았다. 왠지 가장 불쌍한 이들은 박격포 주특기를 받은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육군훈련소에 머물러 주특기 교육을 받아야 했다. 미니버스를 타고 떠난 병사들과 달리 그들은 신상 군용품으로 가득 찬 더블백을 짊어 매고 도보로 교육장으로 떠났다. 함께 훈련을 받은 이들은 그들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오래오래 바라보았다.기차 한 량이나 두 량에만 군인들이 탈 예정이었다. 나머지 칸은 일반인. 자꾸 탈선하고픈 날, 아는지 모르..
S를 만났다. 2011년도에 그를 만났다. 그때 그는 총각이었는데, 이제는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물론 그간 틈틈이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찌 사는지 삶의 세간은 대강 알고 있었지만, 오늘 만나 그러한 변화를 떠올려보니 30대 초반은 소름끼치게도 신속하게 움직인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이 회사의 신입이었다. 지금은 어느덧 3년차 직장인이 되었고, 쓴맛도 보고 단맛도 보며 살아간다. 쓴맛과 단맛을 오가며 세 번 이사를 했고, 적금도 붓고 전세자금대출을 받기도 했다. S도 어제 이사를 했다. 신혼집으로 삼은 빌라를 벗어나 아파트로 옮겼다. 전세가 없어 반전세로 들어갔단다. 월세 낼 생각에 걱정부터 하던 그였지만, 막상 이사한 집을 가니 기분이 좋았단다. 넓고 ..
몇 해 전 그날, 낮잠을 자다가 울린 전화벨 소리에 깨어 등단 소식을 접할 때, 내가 처음 느낀 감정은 정복욕과 무력감의 중간 어디쯤에 있었다. 그때 나는 잦은 휴학으로 십년 가까이 학부생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틈틈이 용돈은 벌었으나 대부분은 안 그래도 텅 빈 부모님의 주머니에 기생해 습작생 신분을 연명하고 있었다. 등단이라, 그 감정은 자신감에 차 있었으나 위태로웠다. 아마 전화를 끊고 한숨 좀 더 잤을 거였다. 그날 그렇게 시인이 되었다. 동시에 나는 시인이 아니었다. 괜히 시작했나 싶었다. 나의 시는 노래도 희망도 좌절도 혁명도 될 수 없는 무엇도 아닌 상태였으니까. 김남주 시인에 대한 산문 청탁을 받았을 때, 꼭 쓰겠다고 한 건 일종의 반성문을 쓰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등단 ..
출판사에 취직해서 월급쟁이가 된 지 두 해가 지났다. 그전부터 나는 시를 내 노동 행위의 결과물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사대보험이 적용되는 그 순간부터 나는 투잡족이 되었다. 한 쪽은 고용주가 따로 있어 불편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한 쪽의 고용주는 나라서 성과에 압박감은 그다지 없다. 그저 여덟 시간 일하고 돌아와 (매일 그럴 수는 없는 일이지만) 노트북을 펼칠 뿐이다. 동시에 심도 있게 태업한다. 시를 쓰겠다고 자세를 잡고서는 책을 읽거나 미국 드라마를 보며 맥주를 홀짝인다. 그런 나태에 나는 만족한다. 그리고 만족하는 나를 자책한다. 시에 대한 나의 발언은 대게 소심한 편이다. 왜 하필 시를 쓰게 되었을까, 가끔가다 생각하곤 하지만 이마저도 투정이다. 처음 시를 썼을 때는 시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
서울에 와서 알게 된 두 친구가 곧 결혼을 한다. 내 애인의 대학 동기 Y와 애인의 선배이자 Y의 애인인 K. 둘은 오래 연애를 한 끝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내가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는 둘은 결혼에 대한 생각은 있었지만, 계획은 없었다. 그저 연애를 하고 친구들과 만나 즐겁게 노는 게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둘은 저녁이면 자전거를 타고 마포구청역 인근을 달렸다. 막걸리를 마시고 노래방을 갔다. 그게 행복해 보였다. 세상의 간섭을 피해 둘만의 재미를 찾아 사는 것 같았다. 둘의 결혼 이야기가 나온 건 갓 봄이 지날 무렵이었다. Y의 부모님이 결혼을 하라며 밀어붙였던 것이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 했던 K는 당황했다. Y는 때마침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K..
옥탑방에서 두 번째 여름을 보내는 중이다. 작년에는 초복, 중복, 말복까지 잘 견디고 중고 에어컨을 설치했다. 찌는 무더위 속에서 방바닥에 달라붙어 있다가 내린 결단이었다. 하지만 전기세 걱정에 웬만한 더위가 아니고서는 에어컨을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대신 더위를 피하는 다른 고전적인 방법들을 쓰는 편이다. 샤워를 자주하고, 문을 활짝 열어둔다. 집 벽에 물을 뿌리기도 하고, 가만 누워 체력 소비를 최소화한다. 여기까진 해가 지기 전까지의 작업들이다. 해가 지면 비로소 여름날, 옥탑방만이 할 수 있는 몇 가지 행복한 일이 일어난다.주인아저씨가 가꾸는 작은 텃밭 옆에는 내가 이사할 때 사둔 작은 테이블이 있다. 그리고 등받이가 없는 플라스틱 의자 두 개와 애인이 주워온 의자 하나가 있다. 겨우내 텃밭이..
일 년의 절반정도까지 무사히 왔다. 지난 반 년, 사랑을 했고 적금을 꼬박꼬박 부었으며 청탁의 마감은 지켜가며 큰 사고없이 지냈다. 전세를 얻으려는 시도를 잠깐 했지만 금방 접었다. 몇 개의 화분을 들였고, '쑝'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양이와 함께 잠을 이루기도 했다. 퇴근을 하면 옥상에 가져다놓은 간이테이블에서 글을 쓴다. 이제 나머지 절반을 생각한다. 언젠가부터 앞날을 생각할 때, 두근거리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보다 무사히 잘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된다. 부정적인 건 아니다. 다만 희망이 없다는 것에 동의하고, 열심히 살다보면 뭔가 달라질 거라고 믿으며 하루하루 왠지 정직하게 살고 있는 이 일상이 서글플 뿐이다. 어제는 단연코 연예병사들이 화제였다. 위문공연을 끝낸 그들은 사복차림으..
해야 할 일이 있지만 오늘도 나는 태업이다. 1월 4일, 일년도 4일이나 지났다. 오늘만큼은 아무런 글이라도, 대책 없는 글이라도 휘갈기고 싶다, 라는 생각을 품은 지도 벌써 몇 달 전이다. 그래서 오늘은 간략하게나마 지난 시간을 기록하고자 한다. 취업을 했다. 편집자가 되었다. 세 권의 책을 내었다. 잘 나가는 책은 없었으나, 재밌는 책은 있었다. 꼼꼼하지 못한 성격 탓에 일은 잘하지는 못한다. 많은 시간을 딸기 밭에 산다. 그 시간들이 괴롭지만, 일을 하여 돈을 번다는 거, 조금은 흥미롭고 조금은 퇴폐적이고 조금은 귀찮은 일이다. 그리고 나는 이별을 했다. 삶의 가장 밑바닥을 친 느낌이었고,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이별, 어쩌면 아주 오래 전부터 내 스스로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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