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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그날, 낮잠을 자다가 울린 전화벨 소리에 깨어 등단 소식을 접할 때, 내가 처음 느낀 감정은 정복욕과 무력감의 중간 어디쯤에 있었다. 그때 나는 잦은 휴학으로 십년 가까이 학부생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틈틈이 용돈은 벌었으나 대부분은 안 그래도 텅 빈 부모님의 주머니에 기생해 습작생 신분을 연명하고 있었다. 등단이라, 그 감정은 자신감에 차 있었으나 위태로웠다. 아마 전화를 끊고 한숨 좀 더 잤을 거였다. 그날 그렇게 시인이 되었다. 동시에 나는 시인이 아니었다. 괜히 시작했나 싶었다. 나의 시는 노래도 희망도 좌절도 혁명도 될 수 없는 무엇도 아닌 상태였으니까.

 

김남주 시인에 대한 산문 청탁을 받았을 때, 꼭 쓰겠다고 한 건 일종의 반성문을 쓰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등단 이전에는 그래도 자주 분노했는데, 그 이후에 나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 대부분 침묵하는 편을 택했다. 시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었는데, 눈치도 염치도 없이 지내는 날이 오래되다보니, 억지스럽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세상일에 입을 다물게 되었다. 자괴감이 들어 그러한 것을 시로 쓰려고 해도 그건 노래가 아닌 의식이 되고 말았다. 의식은 힘이 없었다. 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이후엔 그 의식마저도 퇴화해 가는 걸 느꼈다.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글을 쓰는 지금, 나는 김남주 시인의 낭송을 듣고 있다. ‘양키’와 ‘자본가’라는 단어가, ‘조국’과 ‘투쟁’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그의 시를 듣고 있다. 나를 압도하며 노래처럼 흘러가는 그의 목소리……나도 시인이 되면 그러고 싶었다. 텍스트가 목소리가 되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텍스트 자체가 노래가 되어 흘러가는 시를, 부조리한 세상에 전면으로 가 부딪쳐 벽을 마모시키는 시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말했듯이 노래는커녕 봄날 어느 그늘에 고여 있는 묵은 슬픔도 되지 못한 나의 시는 여전히 김남주를 그리워한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김남주,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이십 년이 되었어도 세상은 여전히 기괴한 구조다.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자리를 여럿 해먹었지만 이 여러 시절 중에서 노동자가 행복하고 제 몫을 제대로 챙겨 은퇴한 날들이 없다는 건 불행하고 또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승만 독재정권 시대에 태어나 문민정부라 자부하던 김영삼 정권 때 세상을 떠난 김남주 시인, 그가 살고 떠난 나라는 나라 살림 키운다고 개인성을 말살시키던 나라였다.

그 뒤의 삶도 변한 건 크게 없다. 보릿고개를 넘기며 어렵사리 살아오고 밤낮없이 참고 일하고 아픔을 견뎌 겨우 집 한 채를 마련한 윗세대 어른들은 쉽사리 보수화되고, 국가와 자본에게 빌려 준 빚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겨우 만든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여당을 지지한다. 국가에 정당히 시민의 권리를 외쳤던 386세대는 또 어떤가. 그들은 뭔가를 정당히 이루었고 승리했다는 과거에 사로잡혀 아래 세대의 정체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의를 위해 작은 건 희생해도 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386세대의 보수화에 대해서 할 말은 많지만 침묵한다. 정치적 보수화가 아닌 세대성의 보수화랄까. 그들 또한 가진 자리와 가진 재산을 공유할 마음은 없어 보인다.

 

이 나라에서 이제 혁명과 자유와 자본과 노동과 평등과 양키와 조국과 투쟁이라는 단어는 촌스럽고 진보적이지 못한 문화재가 된 지 오래다. 진보정당에서조차 보다 세련된 단어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결코 나쁜 시도라고 할 수는 없다.) 현재 문단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에서 위에서 열거한 단어로 이 사회의 현실과 역사를 살펴보려는 노력은 거의 전무하다. (거의 전무한 게 비극적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읽혀지고 있다.) 분명 있긴 있다. 어딘가에는 있다. 그러나 숨은 은유를 찾기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열불 나게 직설적일 뿐이고, 문학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가고 있다.

안도현 시인은 <한겨레신문>에 연재하는 「안도현의 발견」에서 김남주를 이렇게 추억했다. “그는 시인이었지만 스스로 ‘전사’라고 불러 달라 했다. 개인의 문학보다 세상의 혁명에 자신을 바치고자 했던 것이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 활동으로 9년8개월 감옥의 독방에서 보냈다. 감옥에서는 담배를 싸는 은박지에 시를 써서 밖으로 내보냈다. 시가 세상을 바꾸는 변혁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본주의와 미국은 김남주하고 근원적으로 화해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그러니까 김남주는 “개인의 문학을 버리고 세상의 혁명을 자신을 바치고자 하는 시인”이었다. “자본주의와 미국”과 “근원적으로 화해할 수 없는” 시인이었다. 사람들마다 김남주 시인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르겠지만,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여기에 살짝 덧붙이자면, 김남주는 시를 혁명의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문학이 세상에 진 빚을 어느 정도 청산했고, 불온한 시대에 시가 가야할 방향에 대해, 시의 성질에 대해 커다란 질문을 던졌다. 전투적인 언어로도 서정시를 쓸 수 있다는 걸 내게 알려준 건 김남주의 시였고 그의 목소리였다.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 상을 받았다

반평생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처음 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여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 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김남주, 「어떤 관료」 전문


 

침묵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소극적인 발언이 과연 꽤 괜찮고 적당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시를 읽으며, 관료도 아니면서 관료이길 바라는, 그러한 삶을 원하는 나의 한 부분을 떠올린다. 스스로 전사는 되지 못해도 시가 곧 목소리이길 바랐건만 현실은 내 살 길 찾기 바쁘다. 어디선가 나는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나는 철저히 자본주의적 인간이라고 말했다. 자본의 불량한 부속품이 되어 겨우겨우 살아간다. 여기서 교체되면 끝장날까 봐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전사이길 바랐던 김남주 시인, 내겐 그만한 용기가 없다. 시대성은커녕 내 개인의 삶이 안락하길 바랄 뿐이다.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게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저녁을 모른 척했다.

창밖은 폭설이었다. 나는 생의 이쯤에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상 위의 화분은 목이 말랐다. 보일러가 돌아갔다. 창 안에서 바라보는 폭설처럼.

연대(年代)들이 의자에서 발굴되었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할 때도 있었다. 60년대와 70년대와 80년대가 막연했다. 몇 개의 칫솔이 방치되었다. 몇 개의 어금니는 이미 폭설 바깥으로 떠났다.

파티션 너머로 우리는 졸고 책상 건너로 우리는 끽끽거린다. 칸칸이 오해는 쌓여간다. 눈발은 생업과 사상 사이에서 휘날렸다. 나는 코미디가 보고 싶었다.

발굴되기 직전에 우리는 어딘가의 세대에서 빠져나오거나 합가되었다. 사랑만 빼고. 사랑은 그저 데데하게 오고갔다. 눈 덮인 골목이 발목까지 빼앗을까. 눈발이 나뭇가지를 지워나갔다.

나는 서둘러 집에 가고 싶었다.

                                             졸시, 「오피스」 전문

 

 

*

 

작년 박근혜 정부의 최고 히트작은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다. 지하 조직을 결성하여 무력 국가 전복을 계획했다는 이석기 사건을 두고 많은 언론사에 자극적인 제목으로 선량한 시민을 선동했다. 그런데 이석기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사상을 공부하고 무슨 계획을 꾸몄든, 내가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경우는 없다.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과 두 번 집권한 민주당이 내게 피해를 준 건 있어도 이석기는 없다. 그리고 뒤이어 터진 장석택의 처형. 정부와 언론은 꼭 “우리는 법으로 하지만, 쟤네는 바로 죽인다”는 것을 알리듯 복잡한 북한의 속사정을 스릴 넘치게 구성하여 우리에게 알려줬다. 사실, 장성택이 죽든 말든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은 현재 박근혜 정부이고 강정마을 해군기지, 밀양 송전탑, 철도 민영화(각종 민영화) 등 귀를 닫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있는 현안들이 많다. 관료가 돈의 맛을 아니까 나라꼴이 우습기만 하다.

김남주 시인의 20주기. 세상은 변한 게 없다. 그는 자본과 싸웠는데, 그가 옳다. 민주화와 더불어 노동자의 권리도 함께 챙겼어야 했다. ‘조국’이라는 단어도 함께 성장했어야 했고 ‘양키’를 멀리 해어야 했다. 노동자가 금, 토, 일은 쉬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지었다는 아들의 이름 “김토일”. 노동자가 금요일에 쉴 수 있는 날은 어제쯤 올까 싶다. 30주기에는 이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민주화’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미래는 없다. 구체적인 삶(김남주의 시에서 등장하는)에 대한 요구가 없이는 늘 우리는 이 삶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말했듯이 이 글은 반성문이다. 노래가 되지 못하고, 어떤 의미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 나의 시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반성문이다. 김남주 시인의 시를 읽고 그의 낭송을 다시 챙겨 들으며 벼락 하나쯤 내 가슴을 관통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내 시도 벼락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의 서정도 세상을 바꾸는 슬픔이 되었으면 좋겠다. 미루던 글을 설날 전 날에 쓰니, 어떤 다짐 같은 게 되어버렸다. 가족을 피해 ‘스타벅스’에 와서 이 글을 쓰고 있으니 여전히 나는 낭송도 못하는, 철저히 자본주의적 인간이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반성한다. 10년 뒤에는 적어도 이보다 나은 자세를 갖기 위해. 적어도 삶을 들썩이게 하는 하찮은 리듬이라도 갖기 위해.




(실천문학/2014년 봄호/백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