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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 생활자의 수기

나는 태업합니다

typistzero 2014. 2. 12. 13:39

 

출판사에 취직해서 월급쟁이가 된 지 두 해가 지났다. 그전부터 나는 시를 내 노동 행위의 결과물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사대보험이 적용되는 그 순간부터 나는 투잡족이 되었다. 한 쪽은 고용주가 따로 있어 불편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한 쪽의 고용주는 나라서 성과에 압박감은 그다지 없다. 그저 여덟 시간 일하고 돌아와 (매일 그럴 수는 없는 일이지만) 노트북을 펼칠 뿐이다. 동시에 심도 있게 태업한다. 시를 쓰겠다고 자세를 잡고서는 책을 읽거나 미국 드라마를 보며 맥주를 홀짝인다. 그런 나태에 나는 만족한다. 그리고 만족하는 나를 자책한다.

 

시에 대한 나의 발언은 대게 소심한 편이다. 왜 하필 시를 쓰게 되었을까, 가끔가다 생각하곤 하지만 이마저도 투정이다. 처음 시를 썼을 때는 시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라고 말하곤 하지만 세상은커녕 내 자신도 바꾸기가 힘든 일이라는 건 수능 성적표를 받아보고 알았다.

사실은 시인이 제 입으로 시에 대한 철학이나 시인의 자세 등을 일장 연설하는 것만큼 재미없는 일도 없다. 그건 연장을 다루는 사람들이 일을 하다가 ‘이 회사 망치가 좋다.’ ‘아니다. 저 회사 망치가 좋다.’ 식의 논쟁 같은 실용성도 없다. 어쩌면 나는 “시인은 시로 말한다”는 출처가 불분명한 경구를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헛소리를 자주하고 말하는 걸 싫어하지 않으며 내 주장을 개진하는 데 있어 확실한 편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입을 다무는 건, 시에 대해 이야기할 때이다. 시는 내 언어에 속한 한 세계니까. 그걸로 됐다고 생각한 것일까.

 

얼마 전에 어슐러 르 귄의 『어스시의 마법사』를 읽다가 재밌는 말이 있어 따로 적어두었다. 게드라는 마법사 견습생에게 어떤 선생이 한 말이었을 거다.

“위대한 힘을 지닌 많은 현자들이 단 한 사물의 이름, 유실돼 있거나 숨겨져 있는 이름 하나를 알아내는 데 전 생애를 바쳐왔다. 아직까지도 그 목록은 끝나지 않았지.”

이 소설에 시인과 마법사는 언어를 쫓고 언어를 잇고 세계를 만드는 데 있어서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시인은 언어를 알리고 마법사는 숨기는 데 있다. 시인을 인쇄된 텍스트로 마법을 부려야 하고, 마법사는 자신이 터득한 주문으로 직접 마법을 부려야 한다. 그러나 시인도 숨기는 게 있다. 언어를 분해하고 꿰고 조립하며 순식간에 한 세계를 만들고 한 세계를 감정에 전염시키는 과정. 그 과정은 모호하고 주관적이다. 밝혀지는 순간, 주문을 도난당한 마법사 꼴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침묵한다.

 

언어와 언어가 밤새 모였다가 흩어지고 다시 모이면서, 비로소 시가 되었을 때만큼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밥값 했다고 만족하는 경우는 드물다. 스스로 만족스런 시들을 문학잡지 메일로 보내고 난 직후는 소소한 월급날 같다. (적어도) 나는 언어의 노동자니까. 그 정도에 배불러도 된다고 생각한다. 내 책상에서 이루어진 일이니까 그건 온전히 내 몫이다. 내 시작(詩作)의 연봉이 시라면, 나는 하루하루를 어쨌든 버티고 사는 것이다. 나는 이걸로 만족한다.  





(서정시학/2014년 봄호/백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