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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3, 공병장비정비. 내게 주어진 주특기였다. 원래대로라면 4월 5일 훈련소를 나와야했지만, 휴일이었기에(아직 식목일이 공휴일이었던 2001년……)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하룻밤을 더 자서야 육군훈련소를 벗어날 수 있었다. 환장하도록 따스한 봄날이었다.

훈련병들은 퇴소 무렵에 주특기를 받았다. 왠지 가장 불쌍한 이들은 박격포 주특기를 받은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육군훈련소에 머물러 주특기 교육을 받아야 했다. 미니버스를 타고 떠난 병사들과 달리 그들은 신상 군용품으로 가득 찬 더블백을 짊어 매고 도보로 교육장으로 떠났다. 함께 훈련을 받은 이들은 그들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기차 한 량이나 두 량에만 군인들이 탈 예정이었다. 나머지 칸은 일반인. 자꾸 탈선하고픈 날, 아는지 모르는지 기차는 상무대로 향했다. 나는 같은 주특기를 받은 동기들과 이런 이야기 했다. “삽자루나 호미 등을 고치게 되겠지. 근데 그게 교육이 필요해?” 미처 몰랐던 거다. 그곳에서 10주 교육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포클레인과 불도저과 같은 유압장비 정비를 교육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고등학교 때 문과를 선택했으며, 대학은 문예창작학과를 진한한 나는 10주간 거대한 엔진을 해체하고 조립하는 시간을 보냈다. “조립은 해체의 역순.” 이 명료한 문장을 가슴 깊이 새겼지만, 이상하고도 괴상했다. 실습용 엔진을 해체하고 조립하다보면 언제나 나사 하나씩 남아 있었다. 도대체 어디에 박혀 있었는지 모를 나사 하나를 손에 쥐고, 나도 어딘가 나사 하나 풀린 사람처럼 행동하기 일쑤였다.

 

10주…… 이등병이 끝날 무렵에야 자대배치를 받았다. 기차로 용산까지 이동 했고, 지하철을 타고 한참을 또 이동했다. 다음에는 버스를 타고 또 달렸다. 보충대에서 이틀 정도 묵은 다음 미니버스를 타고 자대로 향했다. 비가 오고, 안개가 많이 낀 날이어서 주변 환경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자대에 대한 첫 느낌은 그야말로 기괴했다. 독립 중대였는데, 안개 저쪽으로 트럭에 실린 배가 보였다. 그리고 거대한 무언가를 뒤에 실은 트럭들.

그곳은 6공병 여단의 906 도하중대였다. 트럭 뒤의 거대한 무언가는 부교였고, 배는 BEB라 불리는 교량가설단정이었다. 그리고 행정보급관님의 계급은 원사였고, 중대장님의 계급은 소령이었다. 행정보급관님은 거대한 우산을 하나 펼치더니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부대를 소개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예창작학과를 나왔고 시를 쓰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을 기억하신 행정보급관님은 내가 전역 하는 날까지 글 쓰는 시간, 책 읽는 시간을 남몰래 많이 주셨다. 그리고 전역 후에, 내가 중대에 두고 온 통장을 집으로 보내주시면서 좋은 작가가 되길 바란다는 편지까지 동봉하기도 했다.

 

정비병이 할 일은 장비의 목숨 연장이다, 라고 생각했다. 거대한 발전기와 콤프레샤는 나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많았다. 그 장비가 아직 멀쩡하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선임들로부터 기계를 정비하는 걸 다시 배워나갔다. 문제는 감사가 나올 때였다. 아무리 멀쩡하게 돌아가는 기계라 할지라도 어딘가 기름이 새길 마련이었다. 정비병은 2인 1조로 기계에 붙어 감사관이 왼쪽 면을 볼 때, 오른 쪽에 흐르는 기름을 닦고, 오른 쪽을 볼 때 왼 쪽 면에 흐르는 기름을 닦으며 위기를 모면했다. 나의 말년에, 새로 온 이등병이 배터리에 점프 케이블을 연결하다가 배터리를 폭발시키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때문에 말년에 나는 후덕하신 장비관님 안에 내재된 악마를 봐야했지만.

 

정비병은 돌봐야 할 기계 중에 아웃보드 모터란 게 있었다. 고무단정 뒤에 매다는 내연기관으로 물 아래 프로펠러를 움직여 이동하는 기계였다. 아웃보드 모터는 다루기 쉬운 기계였는데, 이걸 다룰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정비병들은 1년에 몇 개월은 28사단 태풍부대 수색대로 파견근무를 가야 했다. 파견 근무를 가면,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는 장점과 대대의 큰 피엑스(독립중대의 피엑스는 구멍가게 수준이었다.)를 이용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런데도 가기가 꺼려졌다. 수색대원들과 훈련을 같이 받아야한다는 불편한 진실이랄까. 고무단정을 짊어지고 뛰어가는 수색대원 틈에 끼어 문과출신 공병인 나는 신물을 삼키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그곳에서의 경험은 내 군 시절에 있어서 가장 큰 추억으로 남은 기억이다. 고무단정을 타고 임진강을 오르내리던 기억. 깊은 곳까지 보이는 깨끗한 물과 하늘을 뒤덮는 새까만 새때. 절벽 곳곳에 보이는 폭탄 자국은 전쟁의 상처를 아직 보듬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에서 내려온 여러 물건들. 조잡해보이지만, 착한 아이가 신고 다녔을 아기의 신발도 있었고, 무늬가 촌스런 옷가지도 있었다. 어떤 날은 떠내려 온 그물을 건져 올리기도 했다. 강은 남북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고, 나는 검은 색 고무단정에 수색대원을 실고 그것을 떠다녔다. 전역을 해도 그 풍경을 다시 와서 보겠노라고 다짐했지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

 

나는 지금 파주출판단지에서 일하고 있다. 아버지가 근무하신 임진각이 근방이고, 내가 훈련받은 한탕강과 임진강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다. 하지만 돈벌이에 묶여 어딜 잠깐 구경 가기가 겁이 난다. 군대에 있을 때도 물론 답답했는데, 적어도 그때는 희망이 가득했다. 그러나 지금은 희망에 조금씩 금이 간다. 어느새 나는 민방위 대원이 되었다. 20대 초반은 어느새 10년 전의 이야기가 되었다. 나는 가끔, 길을 가다가 기름 냄새를 맡으면 기름 때 뭍은 정비병이었던 군 시절 추억을 떠올린다. 그 추억의 끝에는 강이 보인다. 다시는 갈 수 없는 강이. 그 강은 나의 군 시절이기도 하다. 다시는 갈 수 없지만, 떠올리면 아려오는, 20대 초반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군대에 있을 때, 나가면 무엇이 되겠노라고, 얼마나 열심히 살겠노라고 다짐했던 기억이 아직까지는 나를 울력하듯이 조금씩, 조금씩 뒤에서 밀어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육군, 2013년, ?월)